아리고 사키는 누구인가?

2025. 3. 8. 21:31coach

반응형

 

이탈리아 축구 감독 명장, 아리고 사키

 

"나는 전혀 기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너는 먼저 말이 되어먄 했어" 그가 1987년 밀란 코치로 부임했을 때의 아리고 사키의 말이다. 그 때, 그는 축구계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었다. 

 


# 사키이즘, 현대축구를 만들다.

 

어린 시절

그는 1946년 라벤나 주 7000명의 공동체가 이루고 있는 'fusignano'에서 태어났다. 사키는 축구 선수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그는 이른 나이로부터 그 스포츠에 광적으로 빠져지냈지만, 처음에, 피치 위에서 구현되지는 않았다. 

 

수비수 사키는 열심히 뛰었지만, 아마추어 레벨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의 선수 커리어 대부분을 지역 클럽 ' fusignano' 보냈다. 대신에 그는 아버지 회사의 신발 세일즈맨으로서 일했다. 사키는 프로 축구 선수로서 화려한 삶을 누리지 못했다. 

 

레알 마드리드와 네덜란드

 

26살에, 'Baraca Lugo' 라는 또다른 지역 클럽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지만, 그는 그의 진로를 코칭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사키는 어린나이부터 경기를 살펴보는 학생이 되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1950년대 위대한 레알 마드리드 팀을 관전했고, 빠르게 감화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네덜란드 팀이 사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 팀은 나에게 미스테리였어요.' 사키가 리누스 미헬스의 팀에 대해 말했다. " 텔레비전은 너무 작았어요. 나는 모든 것을, 그러니까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기위해 전체 피치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죠. 그리고 큰 감동을 느꼈어요."

 

분명히 사키는 공격 전술에 대한 자연스런 열망을 가졌다. 그러한 점에서, 그는 이탈리아 축구계의 이단아였다. 사키가 그의 코칭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 이탈리아의 플레이 스타일은 헤레라와 로코코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축구처럼 여전히 수비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하부리그

Baraca Lugo에서, 사키의 능숙한 코칭 재능은 누가봐도 분명했다. 거기로 부터, 'Bellaria'로 이적했고, 1979년에 세리에b 클럽인 'Cesena'에 유스코치로 합류했다. 그의 완벽한 헌신이 요구되는 직업이었다. 사키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관리자로서 일하고 있는 중이었고, 매출은 나날히 증가 중이었다. 

 

'Cesena'에서 그에게 제의가 왔을 때, 신발과 축구 사이에서 결정해야만 했다.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이탈리아 축구계에서 전설의 시작이었다. 사키는 세리에C 라미니에 부임했고, 우승권에 근접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가 파르마의 전권을 이임받기 전, 유스 코치로서 최고의 무대의 피오렌티나로 이적했던 것은 충분한 투자였다. 

 

AC밀란

 

격렬한 강도속에 플레이했던 파르마는 밀란의 사장 벨루로스쿠니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뭔가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1987년 그는 사키의 실적에 확신이 없던 사람들의 회의적인 태도를 무시한채 사키를 임명했다.

 

사키가 부임하기 전에, 밀란은 12년동안 세리에 우승을 단지 1번만 했을 뿐이었다. 재능있던 선수들은 성과가 저조했고, 그래서 사키는 그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주었다. 그는 "나는 'Fusignano'에서 온 촌놈이지만, 너희들은 뭘 해냈니?" 라고 첫번째 훈련 세션동안 그의 선수들에게 질문했다. 사키가 클럽을 떠날 즈음에, 그들은 많은 우승을 거머줬다. 그들은 첫번째 시즌 세리에A 우승을 일궈냈고, 두번의 유로파 컵 우승으로 이어졌다. 그가 떠난 후, 이탈리아 축구는 달라졌다. 

 

사키는 항상 무엇보다도 즐거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만약 당신이 역사에 기록이 되려면, 단지 승리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당신은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 " 라고 그가 말했다. 밀란은 해냈다. 3명의 더치맨 (레이카르트,루디 굴리트,반 바스텐)은 유연하고,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수비에, 정신적 지주 프랑코 바레시, 그는 사키 전술의 핵심 기반이었다.

 

사키 하의 밀란은 혁신적이었고, 성공적이었다. 명성을 근거로 호사가들에게 오해받던 코치가 입증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말년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의 전술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사키는 그의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데 분투했다.

 

밀란 이후

그는 1991년 이탈리아 국대를 맡기위해 밀란은 떠났다. 그러나 그는 제약이 많은 국가대표 경기로 인해 좌절을 느꼈다. 사키는 이탈리아를 1994 미국 월드컵 결승으로 이끌었지만, 그들은 승부차기 끝에 브라질에 패했다. 아주리(이탈리아 축구대표팀의 애칭)는 정말 확신하기 힘들었고, 사키는 유로96 그룹스테이지 탈락 후 해고되었다. 

 

그는 잠시 밀란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이전 성공을 재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나서 2001년 스페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또다른 시즌 파르마에서 실패가 이어졌다. 이사직에 수행하며 그에게 곧 스트레스와 관련된 질병이 찾아왔다. 그의 코칭 커리어는 끝이났다. 그러나 사키는 그의 커리어 후반기로 기억되서는 안된다. 

 


#결론

 

몇몇 코치들은 짧은 기간 동안 그가 밀란에서 했던 것처럼 그러한 엄청난 임팩트를 남겼다. 높은 수비 라인, 프레싱 게임은 오늘날 어디에나 있는 것들이며, 수많은 역랑있는 코치들에 의해 활용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리고 사키 영향없이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다. 

 


원글:티포풋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