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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랑닉(Ralf Rangnick)'은 누구인가?

hyucks 2024. 2. 25.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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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축구의 아버지 랄프 랑닉
랄프 랑닉은 현대 축구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랄프 랑닉은 현대 독일 축구의 아버지 중 하나로 불린다. 하이-프레싱, 종적인 게임은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며, 그가 영향을 끼친 이 개념들은 전 대륙에 걸쳐 클럽에서 전술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랑닉은 임시 감독으로 맨유에 합류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여름이 시작되면 2년간 컨설팅직을 맡을 예정이다. 근데, 랄프 랑닉은 누구일까?
 


# 랄프 랑닉은 어떻게 독일 축구를 바꾸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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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바노프스키와 아리고 사키

자, 일단 그는 선수시절이 길지 않았다. 울름1846에서 25세 나이에 방출된 그는 1983년 고향팀 빅토리아 박냥에서 코치겸 선수로, 코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곳은 정체성이 형성된 기회를 얻은 곳이다. 그는 레전드 로바노프스키 감독이 있던 디나모 키예프와의 친선 경기에서 (머리가)번쩍이는 경험을 했다. 선수들은 지역방어와 볼없을 때의 격렬함, 숨 막힐듯한 압박에 노출되었다. " 나는 90분 내내 지속적으로 압박을 당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 그가 회상했다. " 처음 느껴본 것이었죠, 매우 다른 유형의 축구였어요" 
 
젊은 랑닉은 기차를 타고 로바노브스키의 키예프를 보는 것을 연례행사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맨-마킹 시스템을 신봉하던 1980년대 독일축구협회의 코칭 교육을 넘어선 아이디어들에 노출되었다. 또다른 영향은 아리고 사키였다. 사키는 포백을 기반으로 엄청나게 성공적으로 AC밀란을 만들었다. 그 당시 독일 축구는 여전히 스위퍼 시스템 고집했었다. 이것들은 랑닉이 신뢰하는 축구 시스템의 기본 뼈대였으며, 또한 (당시 독일 축구 분위기와 비교해서)이단아 같은 것이었다.   
 

명성을 얻다

그는 다른 도전에 직면했다. 1991년 유스 챔피언쉽에서 슈투르가르트 U21팀을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필과 성인무대 경험이 부족했다. 그는 1994년 클럽을 떠나며, 3부리그 팀 로이틀링겐의 헤드-코치가 되었다. 18개월동안 승격을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랑닉은 과거 몸담았던 클럽 울름으로 돌아가 매니저 직을 얻었다. 거기서 그는 2번째 시즌을 끝날 때 팀을 지역리그에서 분데스리가2로 올려놨으며, 클럽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처음이었다.
 

랄프 랑닉은 무명 시절 TV 프로그램을 출현하며 교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랑닉은 인기없는 클럽에서, 무명 선수들과 재정 지원없이 성공을 이뤄냈다. 프로필로 돌아와서, 그는 축구를 다룬 독일 텔레비전 초창기 선구자 격인 'ZDF's SportStudio'에 출연했다. 전례가 없던 전술 토론이 있었고, 랑닉은 (그 프로그램) 얼굴마담이 되었다. 그의 상태를 부러워하거나 새로운 철학에 의해 마음을 사로잡힌 사람들 속에서, 다소 조롱섞인 "교수" 라는 별명을 얻었다. 
 
문화적 충돌은 그의 감독 경력에 특징이 되었다. 그는 1999년 슈투르가르트로 다시 돌아가 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2년만에 해고되었다. 2001년, 하노버의 승격을 위해 분데스리그2로 내려갔지만, 2004년 그의 직업을 잃게되었다. 그리고 2005년, 샬케를 분데스리가 2위에 올려놓으며 시즌을 마쳤지만, 다음해 내부갈등과 결과가 악화되면서, 거의 1년 후 그가 해고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랄프랑닉은 축구를 보는 시야를 확장시킨 그리고 보기드문, 매우 광범위한 영향을 갈망하던 워커홀릭이자 완벽주의자였다. 종종 갈등을 촉발시켰지만, 또한 그것이 그의 커리어의 제 2막을 형성시켰다.  
 

호펜하임

2006년, 그는 인구가 적은 중소도시, 그렇지만 억만장자 호프의 재정적 지원이 있는 신흥클럽 호펜하임 감독이 되었다. 그 클럽은 3부리그에 있었고, 랑닉의 말에 의하면, "백지상태" 였다. 그래서 그의 개성에 맞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랑닉은 분석가와 심리학자와 같은 특별한 지원 스태프들을 고용하는 것을 신뢰했으며, 또한 그의 게임 모델에 맞게 영입 전략을 맞추었다. 그는 빠르고, 강렬하고, 목적의식이 있는 축구를 원했다. 그래서 어리고 유연한 선수들, 되도록이면 23세 이하의 선수들을 요구했다. 2년 후 2008년, 랑닉과 호펨하임은 분데스리가에 있었고, 그들 스스로 이름을 떨쳤다. 그들은 강호 도르트문트를 4:1로 간단히 이겼으며, 존중받을만한 성적인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런 종류의 축구를, 우리도 언젠가 플레이하길 원합니다." 라고 패배 후 상대팀 감독 클롭이 언급했다.
호펜하임에서의 그의 시간은 악감정으로 끝났고, 5년 후 사임했다. 그러나 그는 클럽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풋볼 디렉터

레드불 산하 축구단의 아이덴티, 4-2-2-2
동시다발적인 압박과 종적인 축구

그는 샬케를 이끌고,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 진출, 독일 수퍼컵에서 우승하는 중에, 6개월 후, 잘츠부르크와 라이프치히로 풋볼 디렉터직을 맡으며, 2012년 6월 다시 등장했다. (이곳에서의 일은) 랑닉의 현재 지위를 정의하는 최고의 작업물이었다. (그에게 있어) 4번째 분데스리가였고, 거기서의 라이프치히의 여정은 문자 그대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라이프치히에서 발전되어진 풋볼 브랜드의 정체성은 그의 철학의 정점이었다. (한 분야에 정통한) 스페셜한 코치들, 조직화된 스카우팅 시스템, 동시다발적인 압박과 종적인 축구. 랑닉은 2020년에 레드불 산하의 팀을 떠났지만, 그의 아이디어들은 그 조직 DNA에 일부가 되었다. 그의 유산은 계승 발전되었고, 제자들에 의해 지속되었다. 
 


#결론

 
정체성 면에서 혹은 육성되며 그에게 영향을 받은 코치들 중, 클롭과 나겔스만, 투헬 등 스타들도 있지만, 그에게 없는 틈새를 메워주는 외부인이자, 랑닉의 기술 철학을 공유하는 분석가들과 스태프들, 그리고 전세대를 아우르는 덜 알려진 코치 또한 존재한다. 현대 축구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 한 명으로 그를 부르는 것은 결코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글 티포(tifo)풋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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