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리오 퍼디난드(Rio Ferdinand)'는 어떤 선수였나?

hyucks 2024. 3. 10. 19:29
반응형

 

 

리오 퍼디난드는 그의 세대 중 가장 성공적이며 재능넘치던 선수였다. 런던 남쪽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유명한 축구 가족의 일원이었다. 그의 아버지 안톤은 10년의 커리어를 가졌고 그의 삼촌 레스는 1990년대 가장 위협적인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었다. 

 


# 가장 현대적인 센터백, '리오 퍼디난드'

 

어린시절

그는 유스코치와 그에게 '펠레'라는 별명을 지어준 멘토 굿윈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다. 혼란스럽게도, 그는  웨스트햄과 계약 전에 퀸즈파크레인전스, 밀월, 찰튼, 첼시, 미들스브로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축구에 전념하기 전에, 그는 그의 치명적인 두가지 기술, 유연성과 밸런스 향상의 공이라 믿는 유명한 발레 댄서였다. 이 때문에 그는 그의 세대 중 거의 완벽한 롤스로이스 수비수라고 불렸다. 

 

웨스트햄에서 그는 같은시기 램파드.조콜,마이클 캐릭을 배출한 아카데미 연습생으로 있었다. 해머스의 감독 래드냅은 그들이 준비되자마자 1군으로 그들을 데려오면서, 연이은 그의 어린 재능들을 준비시켰다. 그래서 19세에 불과한 퍼디난드는 정규멤버에 속했고, 1998년 월드컵 스쿼드에 포함되었다. 글렌 호들은 교체자원으로 활용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해 거대한 장기 계획을 가졌다.

 

맨유

퍼디난드는 그가 오락거리에 대한 기회를 기꺼이 포착하는 것에 대해 가장 먼저 인정했다. 그리고 과거 결코 돈을 가져보지 못한 어린 축구 선수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는 충분히 피치 밖에서 노동의 결실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나서 그의 커리어 방향이 더 좋게 바뀌는 순간이 왔다. 그는 2000년 18m의 이적료로 리즈로 이적하게 되었다. 그는 런던을 떠난 것이 '터닝포인트' 였다고 말한다. 그는 2008년 가디언지에 말했다. "나는 앉아서 시간을 가졌어요. 반추하고, 생각하고, 만약에 내가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언젠가 내가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그리고 일을 착수했죠. " 

 

 

2002년 월드컵 즈음을 회상해보면, 그는 팀의 핵심이었다. 리즈 유나이티드는 챔스 준결승에 진출했고, 퍼디난드의 평판은 성장했다. 그와 솔 캠벨과 형성한 파트너쉽은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조합 중 하나였다. 그리고 BBC는 퍼니난드가 현재 월드클래스에 속하는지 아닌지 토론했다. 토너먼트의 여파로, 리즈의 재정 부실관리는 그들의 발목을 잡으면서, 퍼디난드는 그의 커리어 행보에 전환점을 만들었다. 그는 알렉스 퍼거슨의 맨유와 30m으로 계약했다. 나머지는 역사였다. 

 

2002년과 2014년 사이 그는 맨유에서 455번 출전했다. 그 중 444번이 선발출전이었다. 오직 18명 만이 통틀어 그보다 더 많이 출전했고, 오직 15명 만이 더 많이 선발 일원이었다. 그는 그가 주장으로서 프리미어리그를 6번 우승했고, 2번의 리그컵, 한 번의 챔스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맨유 일원이었을 때, 그가 경기수준을 끌어올린다고 인정받았다. 그는 나중에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 가장 초초하기만한 시간은 첫번째 훈련 세션이었다. 우리는 공뺏기 놀이를 진행 중이었고, 나는 솔샤르가 "얼마라고, 30m?"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킨 혹은 버트 일거라고 예상했지만, 그가 아니었다. " 라고 그가 말했다.

 

그는 그의 첫번째 시즌 첫번째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클럽에서 가장 험난한 시간이었다. 그는 마약테스트 불참으로 8달 출전금지를 당했다. (테스터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그의 새로운 집을 위해 시트를 사러나간 중이었다.) 퍼거슨은 다른 비슷한 클래스의 선수들과 비교해서 항상 처벌은 가혹하다고 주장했다. 세간의 이목을 끄는 맨유 선수는 어느정도 선례를 만들었다. 그는 이 금지 때문에 유로2004년 출전을 놓쳤지만, 2004/05 시즌 두번째로 올해의 프리미어리그 팀에 뽑혔다. 시즌 1/6만 등장했을 뿐이었다. 그리고나서 2006년, -맨유는 그들의 방법으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되찾던 때- 퍼거슨이 비디치와 계약하면서, 그의 커리어를 다르게 규정하는 순간이 발생했다. 

 

비디치

 

퍼디난드는 그의 영리한 커뮤니케이션과 응집력 덕분에 (파트너를) 훨씬 더 나아보이도록 만들었다. 비디치와는 음과 양이었고, 그들사이에서 그들은 브루스와 팔리스터를 본 이래로 맨유 역사상 최고의 수비 조합을 구축했다. 리오는 그 많은 옐로우카드 없이 수개월이 흐를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과 가로채기를 갖춘 전형적인 깔끔하고 정교한 수비수였다. 사실상, 클럽에서 312경기를 치르는 동안, 그는 불과 파울이 68 차례에 불과했다. 비디치는 다른 유형의 선수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한가지 마지막 논란이 남아있다. 

 

계약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그의 에이전트와 첼시 요리사 피터 켄욘과 저녁을 하는 모습이 찍혔다. 맨유 서포터즈의 무장단체 맨인블랙(men in black)은 퍼디난드의 집에 들이닥쳤고, 그에게 새로운 계약을 해야만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했지만, 아마도 어쨋든 일어날 일이었다. 그는 07/08 시즌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맨유는 리그와 챔스를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그와 비디치는 반 더 사르를 아주 성공적으로 보호했다. 앨런 한센은 "이번 시즌 모든 갈채는 호날두에게 향했지만, 어려울 시기 때, 퍼디난드는 누구보다 더 나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 라고 말했다. 그는 차후 시즌 동안 30경기에 등장했는데, 퍼거슨 감독이 그를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를 로테이션 시켰고, 그의 탁월함이 필요할 때 그에게 전화했다. 

 

2013년 모예스가 감독에 부임한 후, 그는 퍼디난드를 연달아 처음 6경기에 출전시켰다. 모든 맨유 팬들은 어떤 결과가 뒤따르는지 알았다. 퍼디난드의 엔진은 훨씬 많은 주의깊은 관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부상이 필연적으로 따라왔고, 그는 시즌 말미에 (그라운드를) 이탈했다. 망신스런 일이었다. 루이스 반 할 감독이 아마도 그를 활용 할 수 있을 뻔 했다. 

 

은퇴

 

퍼디난드는 한 시즌 동안 퀸즈 파크 레인전스에서 활약했다. 그렇지만 이 배경에 대해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의 아내 레베카가 암과 싸우고 있는 최악의 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2015년 5월 죽었다. 그는 그런 비극의 뒤이어 은퇴했다. 이 후 축구 미디어에서 일하게 되었고, 가장 예리한 전문가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그는 마치 증거가 필요한 것처럼, 주목할만 한 남자가 되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아픔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이들이 직면한 감정적인 문제에 대해 도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감정적인 인사이트를 발전시키는데 전념했다. 그러면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위한 수단으로써, 배움의 수단으로써 그의 분투에 대한 책을 썼다. 

 

자기 개선에 대한 그러한 추진력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수로서 그를 정의한 것이었고, 항상 성장 속에 있었다. 그는 더 좋아지고 더 나아졌다. 그러면서 경기 내 균열을 다듬었고, 실수를 보완했고, 그의 세대 중 가장 좋은 선수가 되었다. 그는 꽤 많은 것을 이겨냈고, 그의 우수한 스타일에 어울리기 위한 본질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