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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문트 이전의 위르겐 클롭

hyucks 2022. 6. 19.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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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시절 평범한 2부리거였던 위르겐 클롭, 마인츠에서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리버풀과 도르트문트 부임하기 오래전, 위르겐 클롭은 독일 2부리그 몇천명의 선수들과 다를바없는 보통 재능을 지닌 수비수였다. 그 이후 일어난 일은 꽤 엄청난 이야기이다. 

 


 

# 위르겐 클롭, 전설의 시작

 

| 마인츠

1995년과 1997년 초 사이, 마인츠의 감독은 볼프강 프랑크였다. 그들은 분데르리가2 강등권을 헤매는 노후화된 녹슨 클럽이었다. 프랑크는 아리고 사키에 매료되어 있었고, 지역방어(zonal marking), 높은 지역에서의 압박(high-pressing), 그리고 스위퍼없이 플레이하는 것, 독일 축구에 반하는 모든 것을 신뢰하는 유별난 특징을 지녔었다. 이러한 두개의 별개의 코칭 철학 속에서, 그의 축구는 예상밖의 회춘한듯한 영감을 주었지만, 승격으로 이끌지 못했고, 위르겐 클롭과 그의 동료들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 

 

2001년 부활절 즈음, 프랑크는 오래 전에 (팀을) 떠났고, 클럽은 다시 분데스리가2로 휩쓸렸다. 마인츠는 하위권에서 그들을 맴돌게했던 독창성이 부족한 그리고 드라마틱한 해결책이 필요한 정통적인 코칭철학을 다시 받아들였다. 스포츠 디렉터 크리스티안 하이델은 에그하르트 크라우춘을 해고하고, 아무도 그를 대체하지 않으면서, 한가지를 발견했다. 하이델이 원했던 프랑크의 축구를 구현하려면,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룹안에 리더가 필요했고, 하이델은 베테랑 라이트백 클롭에게 이끌렸다. 팀은 응답했다. 포백과 지역방어로 회귀했고, 훈련은 다시 반복적인 포지셔닝과 주말의 상대들보다 멀리 달리는 결의에 지배되었다. 시즌이 끝날때 즈음에, 클롭은 그들을 테이블에서 강등을 피하는데 충분히 멀리 이끌었다. 그리고 34살에, 그는 그의 첫번째 풀타임 계약을 맺었다. 

 

다음시즌은 꽤 주목할만했다. 마인츠 1군은 오로지 자유계약으로만 보강했고, 아직 분데스리가를 경험하지 못한 이 클럽은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다음 시즌, 60만 유로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또다른 기적과 가까운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마누엘 프리디히리와 블레즈 은쿠포를 베르더 브레멘과 하노버에 도합 3.5m에 판 후, 마인츠는 골득실차로 승격 기회를 잃었다. 클롭이 강조한 시스템은 선수 개개인에게 알게모르게 향상에 기여했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선수들의)이탈의 영향을 감소시켰다. 그리고 클롭의 경영자적인 성격 또한 드러나기 시작했다. 항상 외향적이고, 자기 주장이 센 선수였던, 그는 (선수시절과)똑같이 붙임성 좋은 사교적인 코치가 되었다. 

 

마인츠의 중앙 광장,

첫번째 시즌이 끝났을 때, 그와 하이델은 팀을 이끌기 위한 거대한 보트를 조직했다. 코치진과 그의 팬들은 발트호프 만하임에서 마지막 경기 후, 승격실패를 인정했다. 그리고 다음해, 승격에서 멀어졌을 때, 클롭은 시 중앙광장에서 거의 만 명에 가까운 마인츠의 서포터즈들 앞에서 거의 시비조에 가까운 연설을 이끌었다. 이러한 성격이 클롭과 프랭크 사이 큰 차이였다. 2021년 클럽 유튜브 채널에서 말하는 것에 따르면, 클롭은 이 클럽의 발전이 시작되게 한 인물로서, 내가 겪어본 최고의 코치로서 프랭크를 묘사했다. 프랭크를 통한 깊은 영향은 내향적이였고, 자기 비판적이었으며, 때때로 그의 선수들과의 유대감을 발전시키기위해 분투하는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클롭의 대화는 힘이 있었다. 그가 사람을 다루는 방법은 기발했고, 어느때 스웨덴의 황무지(?)로 후퇴해서 팀을 정비하는지를 포함했다. 그러나 (선수들과의) 연결 상태는 긴밀했고, 헌신이 뒤따랐다. 

 

| 승격

그리고 2004년에 승격했을 때는 꽤 좋은 시기였다. 그해 여름, 독일은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치욕적인 탈락을 겪었고, 분데스리가는 여전히 다루기 힘들고, 개인 주도적인 리그였다. 클롭만이 유일한 (주류에 대한) 반발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랄프 랑닉의 신흥강호 호펜하임 또한 그러한 분위기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카리스마와 호감을 가졌었다. 대중은 그를 좋아했다. 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방송에서, 독일 방송국 ZDF는 전문가로 클롭을 썼다. 스튜디오 내에서 클롭의 분석은 전술적 해박함과 (남도) 전염시키는 열정으로, 단조롭고 평범하며, 유명한 전직선수 사이에서 다른 무언가를 원했던 시민들을 사로잡았다.

 

어느 누구도 마인츠가 분데스리가에서 자취없이 강등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을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첫번째 시즌, 최저 15위까지 떨어졌지만, 마지막에는 11위까지 회복했다. 바이에른을 몰아세웠던 생존을 매듭지었던 경기 후에, 클롭은 로컬 펍에서 팬들과 술을 마시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페어 플레이 수상의 예우로, 마인츠는 그들의 첫번째 시즌이 끝날때, 예상밖으로 유에파 컵 한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아직 추가 부담은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분데스리가 평균의 절반 규모로, 단지 13m의 연봉 총액에도 불구하고, 마인츠는 다시 11위를 기록하며 살아남았고, 2005-06 시즌은 스탠드에서 서포터들의 찬양을 받는 클롭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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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독일 카니발 축제에서 늘어놓는 동화같은 이야기였다. 클롭은 스타였다. 그 기간동안 마인츠 영입의 일부는 그의 뜻을 따르는 다가올 새로운 계약에 대한 기대와 잘 조직된 시스템, 강렬히 뛰는 팀에 의해 황홀해지는 것에 의존했다. 마인츠는 그러한 그들의 캐미스트리를 깨지않는 정밀한 심사를 가진 수준급의 팀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점은 선수들이 다른 클럽으로 이적하는 것 만큼이나 호감이 가는 이유였고, 기꺼이 그들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적은 드물게 일어났다. 그리고나서, 하이델과 클롭은 뜻밖의 선수을 잃어버렸던 문화를 바꿨다. 2007/08 시즌을 앞두고, 마인츠는 분데스리가로부터 직접 유일하게 영입한 센터백 보 스벤손과 함께, 다섯명의 영구 이적을 위해  단지 1.65m을 소비했다. 이적률은 경이로웠지만, 유지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마인츠가 7경기 동안 분데스리가 최하위가 되는 2006/07 시즌의 비참한 시작을 보았고, 비록 다가오는 겨울 휴식기에서 반등했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6경기에 다시 슬럼프에 빠졌고, 거기서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마법을 잃어버렸고, 분데스리가2가 다시 손짓하는 중이었다. 

 

| 도르트문트

도르트 문트의 홈구장, 베스트팔렌 슈타디온

그러나 클롭은 그들과 동행했다. 그의 프로필은 2007년 2부리그급 감독을 하기에는 분수에 넘쳤고, 아직 그는 완전히 헌신하지 않았다. " 나는 현재 그만둘 수 있는 자격이 없다 " 라고 강등 후 그가 말한 것은 증명되었다. " 나는 내가 은퇴 후 어떠한 미해결 문제 없이, 마인츠에서 살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 그는 그들이 다시 즉각 분데스리가로 승격할 수 있는 한 클럽에 남기로 맹세했다. 강력한 경쟁속에 그들은 4위로 마쳤지만, 클롭 원하는 곳은 많았다. 북쪽의 거인 함부르크가 흥미를 보였지만, 결정을 내리는데 망설였다. 바이에른 뮌헨 또한 관심을 보였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대신에 나중에 끔찍한 실수로 정평이 난 위르겐 클린스만을 선택했다. (그의 능력에 대해)의심이 적은 팀은 도르트문트였다. 

 

한스 요아킴 와츠케는 거의 파산직전의 클럽을 구했고, 토마스 돌 감독의 지극히 평범한 축구에 싫증난 것을 베스트팔렌슈타디온에서 보았다. 클롭에 대해서, 그는 에너지와 도르트문트의 일생과 또한 훌륭한 개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누군가임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분수에 넘치는 경쟁할 수 있는 클럽을 만드는 시스템도 가져다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클럽을 떠난다는 뉴스가 발표되었을 때, 마인츠는 한 시대의 종말에 애통해했다. 그는 스타디움에서 팬들이 작별을 고하는 노래를 불렀을 때, 그리고 다시한번 시 중앙 광장에서 거의 30000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나타났고, 작별인사로 그에게 손을 흔들었을 때, 눈물을 참았다.

 


글 티포(TIFO)풋볼

사진 asia joanna, barry lancaster, ungry young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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