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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미타르 베르바토프는 어떤 선수였나?

hyucks 2022. 12. 5.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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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미타르 베르바토프는 우아한 센터포워드였다. 사치스런 재능과 축구를 쉽게 보이는 마법을 지닌, 이 불가리안은 자신만의 리듬으로 플레이했다. 그러나 자유를 만끽하는 태도와 아주 부드러운 터치와 다르게, (초창기) 시작은 범죄 조직의 위협속에 순탄치않았았지만, 오늘날 그는 기이한 유산을 남긴 것으로 기억된다. 이것은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에 대한 짧은 이야기이다. 

 


# 그라운드의 백작, 베르바토프

 

불우한 어린시절

"초라함"은 베르바토프의 시작을 묘사하는데 적합하다. 그는 1980년초 태어났으며, 불가리아 공산당의 마지막날까지 성장했다. 축구를 접하지 못했던 아이들처럼, 농구공 그게 아니면 돼지오줌보로 저글링을 연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1년 즈음, 그는 CSKA 소피아에 속해있었고, 다음해 분데스리가의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이적했다. 어둠의 힘이 개입하기 전. 라이벌 로코모티브 플로브디프의 오너, 게오르기 일리예프는 10대 베르바토프가 그의 클럽과 계약하는 것을 강요했다.  

 

바이어 레버쿠젠

격변의 시작이었다. 베르바토프는 계속해서 일리예프를 피했다. 그리고 레버쿠젠은 그와 계약하기위해  2m에 영입했다. 키가 크며 건장하지만, 공격적이면서 스타일리쉬했던 그는 2002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했다. 퀄리티 높은 선수들이 활약하는 독일 팀에 잘 맞았다. 그는 스타팅 멤버에 속하지 못했지만, 벤치에서 존재감을 뽐냈다. 그리고 챔스가 진행되는 동안, 리버풀 팬들은 그의 마무리 능력을 목격하면서, 그의 근거리에서의 골은 제라르 울리에의 팀을 햄던 파크에서 열릴 결승으로 가는 4강전에서 고꾸라뜨렸다. 4년 후, 베르바토프는 특별한 선수로 진화했다. 레버쿠젠은 (리그에서) 한가지 기이한 추문으로 챔스 진출에 실패한 2003년 6위에 그쳤다. 그리고 이 불가리안의 골은 달라진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스트라이커로서의 역량은 점점 다양해졌으며, 기세 등등하고, 루즈볼을 빠르게 낚아채는, 페널티박스 안 괴물이 되었다. 또한 그는 박스 주변을 배회하는 창조자였으며, 분데스리가 내 어떠한 선수보다 첫터치(first touch)가 가장 좋은 선수 중 하나였다. 

 

우아한 재능&토트넘

토트넘이 2006년 여름 이 공격수에게 14m을 지불하는 것에 확신한 것은 이러한 종합적인 역량 때문이었다.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베르바토프는 스스로 불안정한 상황임을 알았다. 스퍼스는 결함있었지만, 흥미로운 팀이었다. 그들은 분명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잉글랜드 국대 키퍼 폴 로빈슨, 센터백 레들리 킹, 미드필더 저메인 제나스와 아론 레논, 그리고 공격수 데포와 로비 킨을 포함한 팀이었다. 그렇지만 잉글랜드 축구 엘리트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부터 다소 거리가 있는 스쿼드였다. 스퍼스에서, 베르바토프는 미들스브로 원정 놀랄만큼 아름다운 발리슛과, 웨스트햄 전 한치의 오차없는 정교한 프리킥, 레딩전 4골을 포함헤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인, 2008년 첼시와의 컵대회 결승전에서 동점을 만드는 살떨리던 페널티킥까지 연이은 시즌동안 모든 대회에서 23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클럽은 동시대 부유한 클럽들 사이 지위속에서 그들의 역사를 인정받기위해 분투하면서, 불안정했다. 그리고 더 나은 플레이를 위해 그가 떠나야만 한다는 것은 더 명확해졌다. 

 

마틴 욜 감독은 베르바토프의 두번째 시즌에, 우승 트로피가 있음에도 후안데 라모스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2008년 여름, 예전부터 끊임없는 이적 루머의 대상이 된, 환상적인 궁합을 자랑하던 로비 킨과 함께, 그는 또다른 이적설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고작 30m에 맨유에 합류한 것은 이적기간 마지막 한시간을 남기고 성사되었다. 알렉스 퍼거슨은 그의 자서전에서 " 베르바토프는 에릭 칸토나 혹은 테디 셰링엄의 능력을 지녔다. 그는 번개처럼 빠르지는 않지만, 주위를 살피며 창조적인 패스를 할 수 있다." 라고 썼다. 

 

맨유&다른 스타일

그는 그 모든 것 그리고 그 이상 할 수 있었지만, (그에게)어려운 시기에 였다. 맨유는 유럽 챔피언이었고, 이미 클럽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세계 최고의 3톱 테베즈, 루니, 호날두가 있었다. 그가 어느자리 혹은 어떻게 잘 맞을지는 불명확했고, 한편 호날두와 테베즈는 1년 이내로 떠날 것이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베르바토프의 시간은 여전히 성취감이 부족했다. 그의 개인적인 삶 역시 혼란스러웠다. 합류한지 1년이 지난 2009년, 베르바토프가 마피아 일당과 엄마의 통화 후, 그의 여자친구와 딸을 납치하려는 위협 속에, 그의 조국 불가리아를 떠났다고 보고되었다. 이것은 그의 커리어에 나쁜 영향을 준 두번째 암흑기였다. 피치로 돌아와서, 베르바토프는 4년동안 두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또한 2011년에 득점왕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서, 그는 프리미어리그의 모든 기술 중 가장 관중을 매혹시킨 한 순간을 만들었다. 리버풀전 해트트릭을 비롯 결승골의 일보였던 그의 오버헤드킥같은, 이런 골들은 아마도 그가 편안하게 느끼는 (혼자서)다른 스피드로 뛰는 것처럼 보이던 맨유에서 그를 돋보이게 했다.

 

맨유는 4년동안 두차례나 결승에서 유럽 챔피언이 되는데 실패했다. 둘 다 바르셀로나 상대로. 그리고 베르바토프는 2009년 챔스 결승이 열린 로마에서 벤치에도 앉지 못했고, 2011년에는 심지어 스쿼드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지위와 다소 어색한 롤이 반영된 것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것은 1년 후 맨유를 떠나게하는 이유였으며, 퍼거슨 감독과 작별 인사도 없었다. 둘은 나중에 화해했지만, 마지막 12개월 동안, 고작 12번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 선발 출전한 베르바토프에게는 긴 작별이었다. 아마도 그의 맨유 커리어는 더 많이 이어갔어야만 했을지 모른다. 

 

평온한 말년&클래스

2012년 가디언지는 그의 대체자로서 로빈 반페르시와의 계약을 보도한 후에, 기자는 올드트래포드에서 모순된 성격의 그의 시간들을 기록했다."베르바토프는 몹시 짜증남과 동시에, 기분이 들떠있었다. 그는 번뜩임으로 우리를 매료시켰고, 동시에 나쁜 플레이로 곤혹케했다." 풀럼에서, 그는 다시 토트넘에서 각인시켰던 마법사같은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최대치를 이끌어낸 마틴 욜과 재회했고, 선수 말미 커리어 목표의 혼란을 드러냈다. 그의 폼은 마틴 욜이 그의 고귀한 터치를 묘사하면서, 베르바토프에 관한 멋진 인용구 중 하나를 연상시켰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든 것은 그의 발끝에서 죽은 것 같다." 그는 어떤 미적인 감각들 그 이상이었다. 베르바토프는 첫번째 시즌 15골을 넣었고, 풀럼은 프리미어리그에 쉽게 잔류했다. 그렇지만 그는 팀이 강등을 향해가는 와중에, 두번째 시즌 중간에 팀을 떠났다. 그리고 프랑스, 모나코에서 평온한 말년을 시작했다. 

 

베르바토프는 그가 리그1에 도착할 즈음 기량이 떨어졌지만, 그의 핵심 기술들, 터치, 기술, 위치선정, 시야 등으로 노화를 견뎌냈고, 여전히 트위터 타임라인에 클래스를 증명하는 순간을 뜨게 할 만큼 충분히 좋았다. 예를들어 니스전 그의 태연한 로빙볼 혹은 에비아전 교모한 침투들은 집단으로 묶여있는 수비를 그가 한번 더 비트는 장면이었다. 또한 그는 (모나코에서)18개월 동안 에메레이트에서 치명적인 원정골을 득점하는 순간이 있었으며, 그것으로 모나코는 아스날을 2015년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시켰다. 베르바토프는 한 때를 풍미한 선수이며, 하나 더 있다면, 그가 은퇴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그리스와 인도를 잠깐 거치면서, 지난 10년 가장 컬트적인 선수 중 한 명의 이력서가 완성되었다. 

 


원글 티포(tifo)풋볼

사진 socialb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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