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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시아:바르셀로나 축구 아카데미의 역사

hyucks 2023. 7. 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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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의 현대적인 성공은 독특한 현지 스타일을 통해 성취되었다. 공격을 중시하며, 볼점유를 기반으로하는 축구는 클럽의 특징, (다른 클럽과) 가장 구별되는 정체성으로 남아있다. 또한 바르셀로나는 선수들을 단지 1군을 위해 맞게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스아카데미와 같은 철학을 공유한다. 그러나 또한 온필드(on-field) 정체성을 내재화하는 선수들로 길러낸다. 그리고 그것은 클럽의 유스 아카데미인 라마시아에 핵심이 있다. 

 


# 라마시아는 어떻게 바르셀로나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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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시아의 탄생

바르셀로나의 유스 축구는 루이 데 오쏘가 클럽의 2군을 만들었을 때, 1901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3군과 4군의 팀은 1918년에 추가되었고, 결과적으로 라마시아로 이어지는 욕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안 캄페르 보드진의 멤버인 존 라그는 추가적인 유스와 어린이들을 위한 팀의 필요성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라마시아의 뿌리는 1961년  'Enric Laudet' 회장 선거동안 처음 가시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Laudet'는 결과적으로 클럽의 규범과 스타일 속에서 훈련된 소년들을 형성하는 철학을 세우는 것이 목표인 상주하는 유스 아카데미를 만드는 약속에 대해 위임받았다. 위대한 헝가리 출신 공격수이자, 그 시대 걸출한 아이콘인 쿠발라는 일시적으로 선수생황을 은퇴했었고, 1961년 시설의 헤드 코치로 취임했다.그러나 몇달이 지난 후, 쿠발라가 1군으로 승진하고, 'Laudet'의 바르셀로나 심각한 재정 문제로 시달리면서, 1963년, 재정적인 제약 때문에 문을 닫았다. 

 

라마시아는 전체적으로 바르셀로나 유스 아카데미를 대표하게 되었지만, 팀은 누캄프 건설에 앞서 얻은 땅 일부에 세워지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어린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는 집(고향)이 된 라마시아는 결과적으로 새로운 경기장 건설 동안 물류 허브로서 그들의 두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이 일이 완성된 후, 1966년까지 그 사업은 휴지기였고, 혁신 이후, 바르셀로나의 행정 본부로서 다르게 쓰였다. 

 

루이스 누네즈

1.현재의 모습 속에는, 부분적으로 1978년-2000년사이 클럽 회장 루이스 누네즈에게 신세를 졌다. (회장으로)취임할 즈음에, 누네즈는 새로운 시설을 감독하는 코치 집단을 임명했다. 유스 축구 수장으로 임명된 아마트, 2018년까지 남았으며, 나중에 방법론의 책임자가 된 조안 빌라, 축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재 발굴자 중 한 명인 오리올 토트. 아마트는 클럽에서 꽤 먼거리를 통학하는 유소년들을 위한 거주시설을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누네즈의 1차적 야망은 바르셀로나를 글로벌 스포츠 파워로써 설립하려는 것이었다.

 

2.새로운 약속을 위해 클럽의 본부를 원상으로 되돌리면서, 라마시아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중심으로써 제안되었다. 그것은 빠르게 진화했었다. 1979년 7월, 클럽의 멤버들은 전용 축구 학교의 건설에 대한 지지에 투표했다. 그러면서 그 구역에 대한 재개발과 새로운 스타디움, '미니 에스타디' 건설에 동의했다. 새로운 운동장은 1982년까지 열지않았지만, 1979년 10월 즈음, 현대의 모습이 담긴 라마시아가 출범했다. (그 해)월 초는 정치적 유동성으로 복잡했다. 1979년 11월 즈음, 아마트는 재계약했다. 클럽의 악독한 회장 중 하나인 'Mussons'은 단기적으로 라마시아 내에서 삶의 질의 향상 속에서, 'Grassrots soccer'의 총괄로 임명되었다. 

 

3.그가 주도한 것 중에 하나는, 그 당시 논란 거리였지만 현재는 보편적으로 따르는, 축구와 동시에 전통 교육도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그러먼서 개별 팀에 할당된 선생님을 고용했다. 라마시아에 의해 생산된 선수들이 그들의 평판을 가져다 주는 동안, 그렇게 만들어진 운동선수들을 위한 본질 또한 엄청난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부분적으로 'Musson'의 개혁에 의해 가능했다. 라마시아는 그들의 구조를 갖췄지만, 시그니쳐 스타일을 위해 추가 10년을 기다려야만 했다.그것은 거의 우연히 찾아왔다. 

 

요한 크루이프

1987년, 회장 누네즈의 인기는 엄중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the mutiny of hesperia' 스캔들은 그의 인기에 손해를 입혔고, 회장 재신임을 요구하던 선수들은 떠났다. 누네즈는 그의 포지션 회복을 위해 포퓰리스트가 필요했다. 라리가 4위로 마감하며 비틀거리던 1군과 함께, 루이스 아라고네스는 퇴출되었고, 1988년 5월 그를 대신해서 누네즈는 요한 크루이프를 임명했다. 누네즈와 크루이프는 적이었다. 그들은 바르셀로나 선수로서 크루이프의 마지막 시즌이 끝날 시점에,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스페인의 심장부에서 똑같은 세금 문제로 사이가 심하게 틀어졌었다. 절망적인 시기였다. 크루이프는 엄청나게 인기가 있었고, 이 사건으로인한, 대중 감정의 분열과 누캄프 관중의 급격한 감소 속에서, 누네즈는 통합하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르셀로나가 영원히 바뀌는데 어울리는 조치였다. 

 

크루이프즘

물론 크루이프의 새로운 계획 상당수는 리누스 미헬스의 영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1972년 바르셀로나의 후베닐 A 감독으로 임명되어있던 루이즈의 업무와 관련해서 결실을 맺으려했다. 만약 크루이프가 클럽의 현대적 정체성의 설계자라면, 루이즈는 그것의 창시자였다. 크루이프와 같이, 그도 3-4-3 포메이션 활용을 지지했고, 다양한 아카데미 팀을 걸쳐 사용해야한다고 지도했다. 속도와 파워의 미덕이 예속화된 축구 문화 속에서, 그는 더 작고, 더 기술적인 선수들 상황에 대해 격렬히 논쟁했다. 크루이프는 루이스의 아이디어를 기반에 두었고, 그것들을 완성했다. 1988년에서부터, 3-4-3은 바르셀로나 모든 13개 팀(유스포함)들의 표준으로 동질화 되었다. 각각의 팀들은 공동 훈련의 강조, 볼순환을 위한 원-투터치를 우선하며, 압박, 포지셔닝 플레이를 공유했다. 모든 골키퍼는 후방에서 플레이하는것이 기대되었고, 그러면서 필드 플레이어로서 활동했다. 이런 문화 속에서, 모든 팀들은 공격적인 축구와 빠르게 플레이하는 것이 기대되었다. 

 

라마시아 출신

크루이프는 성공했고, 루이즈는 좌절했지만, 유스아카데미에 일련의 공동 특징을 성공적으로 만들었다. 1군은 항상 어느 감독이건 즉흥적인 전술로 지도되어지며, 외부와 단절된 채로 존재했다. 브랜드 파워와 권한의 무게속에서, 크루이프는 제대로 일관성을 만들 수 있었다. 그의 광범위한 책임은 어린 선수들이 (체계적으로) 연령 그룹을 통해 올라갈 수 있도록 했고, 안전한 구역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실현 가능하다면, 성인팀으로 맨 먼저 빠르게 올라갈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운동 능력과 사이즈에 대한 우대를 제거했다. 루이즈의 인도에도 불구하고, 크루이프 리턴에 앞서, 아카데미는 여전히 신체적인 특성을 우선시했다.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키가 180cm가 자랄 가능성이 낮은 어린 선수들의 (섣부른)전망을 부정했다.

 

그의 플레이 시스템은 볼소유시 지배력에 의존했다. 그것은 볼을 정확하게 받을 수 있고 분배할 수 있는 기술적으로 재능있는 선수들의 창조성을 필요로 했다. 그러면서, 그것을 공간을 공략하는데 활용했다. 그 방향성은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1군과 동화되는 기술적인 선수들의 양성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성장 가능한 재능을 만드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며, 그러면서 바르셀로나 출신은 꽤 달라 라는 평판과 함께, 그들을 클럽에서 활용할 거라는 확신을 가진다. 크루이프의 (라마시아 안에서) 승진시키려는 의지는 이 때까지 이어온 선례를 구축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7시즌동안 1군에 32명의 라마시아 출신을 데뷔시켰고, 크루이프의 4번째 시즌,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1992년 유로피언컵을 우승했을 때, 선발 멤버 중 2명,오른쪽 풀백 알베르 페레와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인 펩 과르디올라를 포함시켰다.

 

펩 과르디올라는 2007년 클럽으로 돌아왔다. 그 때 바르셀로나는 파리에서 아스날을 2-1로 이기면서, 역사상 2번째로 유로피언컵을 우승했었다. 그 경기에서 레이카르트의 선발 멤버 중, 오직 2명(빅토르 발데스,카를레스 푸욜)만이 라마시아 출신이었다. 과르디올라의 챔피언스리그 우승팀, 2009년과 2011년 각각에는, 7명의 라마시아 출신 선수들이 선발로 뛰었다. 

 

펩 과르디올라

과르디올라는 2007년 바르셀로나B의 감독으로서 클럽으로 돌아왔다. 1년 후 그는 크루이프의 추천으로 레이카트르 후임으로 승진되었다. 과르디올라는 (어린선수들의)재능을 살려내는 방법을 바꿨다. 그의 B팀은 어린 선수들로 구성되었지만, 그들은 성공을 위한, 즉 승부욕과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을 보장을 제공하면서,조건을 만드는 더 오래된 전문가의 손에 달려있었다. 과거 크루이프가 그에게 했던 것처럼, 과르디올라가 1군 감독이 되면서 한 첫번째 행동 중 하나는 B팀으로부터 부스케츠를 승격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그가 물려받는 스쿼드 중 불만이 많은 선수와 클럽 철학에 부합하여 플레이할 수 없는 선수를 추방했다. 데코와 호나우지뉴를 팔았고, 피케는 맨유로부터 빼내왔다. 

 

2011년, 새로운 시설로 대체되면서, 최초의 라마시아는 문을 닫았다. 그 전까지 과르디올라의 성공은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두번의 UCL우승, 3회 연속 라리가 우승, 그들의 아카데미에서 성장했던 한 세대를 정의하는 선수들의 힘 하에서 그런게 가능했다. 피케, 메시, 페드로, 그리고 파브레가스는 전설적인 1987 세대이며, 이니에스타, 샤비, 푸욜, 골키퍼 빅토르 발데스, 물론 부스케츠도. 2010년 월드컵을 우승했던 스페인 스쿼드의 9명은 라마시아에서 성장했다. 그해 말, 다시 반복될 가능성은 없는 지지 속에서, 아카데미는 최종리스트에 샤비,이니에스타,메시를 포함하는 3명의 발롱도르 위너를 배출했다. 

 


# 결론

 

과르디올라는 2012년 클럽을 떠났고, 그의 후임은 티토 빌라노바였다. 라마시아 순환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레반테와의 리그 원정, 바르셀로나가 4:0으로 승리한 경기에서, 다니엘 알베스는 전반전 몬토야에 의해 대체되었고, 그들 역사상 처음으로 피치 위 클럽은 홈-그로운 선수들로만 구성되었다. 

 


원글 티포(tifo)풋볼

사진 출처 isriya pairee pairit,sara bak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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