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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유니폼의 완벽한 역사

hyucks 2023. 5. 24.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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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에서 첫번째 축구 경기가 열리기 전까지, 축구 유니폼에 대한 어떠한 규정도 없었다. 하얀색의 크리켓, 포멀 셔츠(정장셔츠), 그리고 플란넬 점퍼 모든 것이 사용될 수 있었다. 몇몇 클럽들은 오래된 학교의 컬러와 셔츠를 채택했고, 한편 다른 클럽들은 다른 팀들과 구별하기 위해 모자와 스카프 그리고 제복을 활용했다. 이 글은 그로부터 현재까지의 여정이다. 축구 유니폼의 역사.

 


# 축구 유니폼은 어떻게 발전해왔나?

 

1880년대 

1880년대 프로축구가 출현하면서, 클럽들은 값싼 유니폼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몇몇 정해진 디자인 속에서, 해비 코튼, 버튼과 목 레이스와 함께 셔츠에 색깔을 입혔다. 축구 리그가 1888년 설립되었을 때, 3개의 클럽들은 밋밋한 셔츠를 채택했었다. 애크링턴(빨간색), 볼튼 원더러스와 프레스턴 노스 앤드(흰색). 다섯개팀은 4등분 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이등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네개의 패널을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아스톤빌라, 블랙번, 더비, 에버튼, 그리고 노츠 카운티 였다. 그리고 4팀은 세로줄 무늬를 선택했다. 번니, 스토크, 웨스트 브롬위치, 울버햄튼.

 

1890-91 시즌 개막전에서, 울브스는 새롭게 합류한 선더랜드로 갔는데, 두 팀 모두 빨강과 흰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필드위에 있었다. 심판들은 울브스를 흰색 셔츠로 바꾸려 했다. 그리고나서 이후, 리그는 모든 스트라이프에 대해 전수조사를 했고, 모든 클럽들은 색깔이 충돌할 경우, 흰색 스트라이프로 바꿀 것이 요구되었다. 울버햄튼은 금색과 블랙으로 현재와 유사하게 바꾸었고, 절반을 가르는 대각선의 흔하지 않는 셔츠와 함께 1892년 시즌을 시작했다. 

 

현대적 유니폼의 출현

다음 10년동안 리그가 확장하면서, 우리가 현재 볼 수있는 가장 대중적인 디자인의 유니폼이 출현했다. 브렌트포드 공원 거리, 큐피알(QPR),레딩의 가로 줄무늬. 더비 카운티, 번리, 아스톤빌라의 슬리브. 찰튼, 리즈 유나이티드, 버임엄 시트의 깊게 패인 V. 반면 서쪽 아래 동네의, 브리스톨 로버스는 8개의 패널이 필요한 디자인을 선택했다. 몇몇 잉글랜드 클럽들은 장식띠와 하나의 큰 스트라이프를 채택했는데,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훨씬 더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그리고 1884년과 1886년 볼튼에 의해 입혀진 물방울 무늬 유니폼은 슬프게도 다시 볼 수 없었다.

 

규제

(유니폼)셔츠의 포맷이 어떻든지, 어떤 누구도 검정색을 입고 플레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그것은 심판을 위해 남겨둔 것이었지만, 수많은 시간동안, 그들은 그 셔츠보다 블레이저 혹은 테일러드 자켓을 입었다. 이러한 규제는 1992년 프리미어리그가 심판이 녹색을 입는 것을 허용했을 때, 잉글랜드에서 해제되었다. 1994년 피파 월드컵의 심판들은 검정색, 노란색, 버건디색을 받아들였고, 그 이후 심판들은 파랑색, 핑크색, 노란색, 녹색 등 다양한 범주의 색깔들을 통하여 풍부한 색채감을 드러냈다.

 

한 세기가 바뀔 때 즈음, 골키퍼들은 그들의 팀동료들과 같은 색깔을 입었고, 모자를 씀으로써 그들을 구분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페널티 구역내에서 핸드볼을 부르기 어려웠고, 그래서 1909년 축구협회는 룰을 개정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골키퍼들이 하나의 컬러로 된 셔츠를 입는 것을 요구했다. 초기에 그들은 빨간색, 흰색 혹은 파랑색 중에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나서 녹색이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빠르게 세기의 중반 활동하던 키퍼들이 선택하던 색깔이었다. 

 

넘버링

셔츠 넘버들은 1차 세계 대전 전에 호주 축구와 1920년대 초 미국 사커 리그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나서 1928년대 잉글랜드, 아스날과 셰필드 윈즈데이 사이 경기에서 보였다. 실험은 1933년 FA컵 결승에서 반복되었다. 에버튼의 선수들은 1-11까지, 맨시티는 12-22까지 그려진 유니폼을 입었다. 피파는 1938년 월드컵에서 1-11 유니폼을 도입했고, 그 이후 그것들을 의무화했다.

 

혁신의 시작

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의 엄브로는 새로운 합성 섬유를 시도한 최초의 회사였고, 1953년 컵 대회 결승에서 볼턴 유니폼 겉이 반들반들한 셔츠를 생산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혁신은 다른 곳으로부터 왔다. 

 

따뜻한 날씨 조건과 많은 스타일리쉬한 패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이탈리아와 남미 제조사들은 가벼운 면화를 사용했다. 또한 그들은 옷깃과 버튼을 금지했고, 그러면서 짧은 슬리브와 더 스마트하게 맞춰진 컷을 제공했다. 1950년대 유벤투스 유니폼을 살펴보라. 트렌드세터들은 브이넥과 타이트한 커트로 유럽 전역에 과시한, 1950년 초 위대한 헝가리 팀의 체리레드 셔츠와 1950년대 말 레알 마드리드의 올 화이트를 포함했다.  

 

엄브로는 잉글랜드와 서독이 1966년 결승전에서 입었던 셔츠는 주목했는데, 그것은 라운드 넥 모델, 열을 식히는 소재였다. 아마도 1950년 월드컵 실패 당시의 새하얀 유니폼을 벗어던졌던 브라질로부터 넘어온 굵은 디자인은, 그 후 브라질을 정의하게 되는 노란색 셔츠. 초록색 테두리, 파란색 짧은 스트립을 채택했다.  

 

스폰서의 등장

1970년대와 1980년대 셔츠는 스폰서 로고의 등장으로 새로운 상업주의가 반영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브라운슈바이크는 첫번째로 1973년 그들의 셔츠에 '예거마이스터' 로고를 (유니폼에) 박았다. 잉글랜드에서, 리그에 속하지 않았던 케터링 타운은 1976년 그들의 스트립에 '케터링 타이어' 로고를 넣었고, 그 이후 FA에서 금지되었다.  

 

새로운 트랜드

1.그러나 1978년 여러 혁신 끝에, 리딩 클럽들 모두 대세를 따르게 되었다. 면화는 폴리에스터에 의해 대체되기 시작했고, 프린팅과 직조에 대한 새로운 기술이 발전했다. 예를 들어, 1980년 잉글랜드 해군의 유니폼은 최초로 셔츠 위에 색깔 구역을 프린트한 것 중 하나였다. 1980년대 말, 유로88에 데뷔한 서독의 기하학적인 3색 리본과 네덜란드의 삼각형과 마름모꼴 타일 프린트가 (어떤) 장르로 정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니폼은 번쩍거림과 복잡한 웨이브 바탕 속에, 장기적이고, 소름끼치는 트랜드가 시작되었다. 

 

2.처음에, 축구 유니폼과 길거리 패션은 교차 혼합(크로스오버)이 시작되었다. 아직 거대한 시장은 아니었지만, 레플리카는 경기장 안과 밖에서 입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우 큰 비즈니스가 되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2021년 300만 이상의 유니폼을 팔았고, 전세계 TOP10 클럽들은 그들사이에서 2000만개 이상을 팔아치웠다.

 

3.또한 그들은 좀 더 어수선해졌는데, 현재 모든 셔츠에는 뒤에 스쿼드 넘버와 선수들의 이름이 마킹되어있다. 1980년대 처음 도입된 유니폼 제조사의 로고는 어디서든 볼 수 있고, 클럽들은 그들의 브랜딩된 문장을 재정의하고 추가했다. 추가적인 광고 영역으로써 팔거나 토너먼트 플레이하는 동안 브랜딩을 제공하는 소매 부분도 추가되었다. 그리고 몇몇 리그에서 셔츠 뒤에 스폰서를 받아들였다.

 


# 결론:축구 유니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최근 축구 유니폼에서 가장 큰 변화는 진보되고 새로운 물질의 활용으로부터 왔다. 유니폼은 더 가벼워졌다. 2021년, 이탈리아는 무게가 72그램에 불과한 푸마 셔츠를 입고 플레이했다. 좀 더 고장력을 가진 물질은 셔츠가 찢어지지 않게 발전되었고, 특정 근육을 보호하고, 압축하는 특별한 패널이 추가될 수 있었다. 한편 피부 바로 밑 소수성 물질은 땀을 마르게하고, 빠르게 증발할 수 있는 셔츠 표면으로 보낸다. 그 모든 것은 거대한 탄소 배출과 함께, 석유와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미래에는 대나무와 커피 찌꺼끼와 재생 플라스틱으로부터 카본 함량이 적은 셔츠를 친환경적으로 만들 것이다. 이것은 크리켓 화이트 셔츠와 포멀 셔츠의 시대 이후의 꽤 긴 여정의 이야기였다. 

 


원글 티포(tifo)풋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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